2007년 06월 07일
[슬레이어즈] 붉은 바다 -03
by JoysTiq
후욱. 심호흡을 한 제르가디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잠깐. 무슨 말 하려는지 아니까 잠깐 기다려봐."
등 뒤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고 손을 짚고 선 자세 그대로 숨을 골랐다. 아주 날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회담장은 눈빛과 화술을 무기삼아 상대방의 좌절이라는 피를 뿌리는 전장이었다. 언제 자기를 반겼냐는 듯 날카롭게 칼날을 들이대오는 아멜리아와, 그런 그녀를 필두로 한 크림슨 측 회담위의 공격을 방어해내고 복잡한 숫자 싸움에 목까지 담겼다가 간신히 빠져나오니, 이번엔 왕자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날 좀 쉬게 해 줘. 깊게 한숨을 쉰 제르가디스는 몸을 돌렸다. 가우리는 침착한 자세와는 달리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설명해 주겠다고 했잖아."
"그래, 알아. 그랬어. 뭐가 궁금한데?"
초조한 기색과는 달리 가우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르가디스는 팔짱을 꼈다. 가우리가 뭘 물어올지 예상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유를 되찾으니 약간의 놀라움마저 찾아들었다. 누구에게나 잘 웃고 가볍게 대하던 저 왕자가 이번엔 진심인 모양이지. 어제의 일을 떠올려본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리나가 그런 식으로 가버린 게 충격이었던가.
가우리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넌 예외인 거지?"
"뭐?"
가우리의 목소리에 불신감이 깃들어있음을 느낀 제르가디스는 팔짱을 풀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외라니?"
"어제 네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노바를 싫어한다면... 노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말야."
아무래도 씁쓸한지 가우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게다가 듣자 하니 작년에 이어 올해 회담에서까지 마도학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마도사 협회장인 그녀가 노바와의 교류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렇다면 네게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정상 아니야?"
아아. 제르가디스는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리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터였다.
"난 원래 노바 사람이 아니거든."
"뭐?"
"너와는 내가 노바 왕궁에 입성한 뒤에 만났으니 몰랐겠지. 난 원래 크림슨의 카듐 지방 옆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 출신이야.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입신할 장소로 노바를 고른 거지."
제르가디스의 말을 되씹어 본 가우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말이 되냐? 그 녀석이 출신 때문에 차별할 것 같진 않은데. 노바에 있고, 노바를 위해 일하면 노바 사람이지."
"그랬겠지. 내가 노바에 들어온 뒤에 리나를 알았다면."
"그럼?"
"내가 리나를 만난 건 어릴 때야. 내가 난 곳에서, 카듐을 오가면서. 종종 그녀를 만났고 친하게 지냈었지. 그 즈음에 아멜리아도 만났고. 인버스 가는 대대로 왕족과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까. 내가 노바로 간다고 했더니 무척 화를 내긴 했지만 뭐, 나는 여기로 왔고, 리나도 나를 아예 못 본 척 하진 못하더군. 어제 만찬에서 본 것처럼. 그게 다야."
스륵. 가우리는 기운이 빠진 모양이었다.
"뭐야. 그것 뿐이야?"
"뭘 바란 건데?"
가우리는 대답하지 않고 책상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풀썩. "으으~" 가우리의 신음을 못 들은 척하고 제르가디스는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 말야, 일 좀 해라! 오늘도 봐, 네가 딴 데 정신팔고 있으니까 우린 말리기만 하잖아. 저 쪽에선 공격해 오는데, 우린 우리끼리도 방향 정리가 안돼서 여기서 한 말 저기서 어긋나니 뭐가 되겠냐? 아멜리아는 처음 해보는데도 잘 하는데, 우린 커맨더 부재라니!"
"뭐야, 네가 알아서 잘 하던데. 난 내가 왜 온 건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 네가 정신 빼고 있으니까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잖아!"
"아냐. 난 태평성대를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지 드디어 답을 얻었어. 즉위하자마자 네게 듀크 작위를 내리는 거야."
"장난하는 거 아냐!"
참다못한 제르가디스는 두꺼운 서류 한 뭉치를 가우리를 향해 던져 버렸다. 흰 종이가 사방에 눈처럼 흩날렸다. 춤추며 내려앉는 종이들 사이로 가우리의 어두운 표정이 보였다. 어휴, 저걸 그냥. 제르가디스는 몸을 휙 돌려 버렸다.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 왜 리나야. 노바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제르가디스는 잘 알고 있었다.
"리나를 만나고 싶다면 리나의 감정을 풀어주면 될 거 아냐. 붉은 바다를 어떻게든 해 봐."
가우리의 맥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손 댈 수 없는 문제야. 부왕이 나서지 말라고 했다고. 여태까지 나도 별 신경 안쓰고 있었지."
"뭐라고?"
제르가디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께서 직접 하명하셨어?"
"응."
뭔가 있기는 있구나. 제르가디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결국 리나가 옳았던 건가.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둘 다 문으로 시선을 돌렸고, 제르가디스가 말했다.
"누구세요?"
"크로츠입니다. 협상안 문제로 상의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가우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르가디스가 대답했다.
"들어오십시오."
항의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가우리에게 제르가디스는 눈을 부라려 주었다.
"일해야지, 일! 망할 왕자야! 내일은 협상 안하냐?"
쳇, 하며 일어서려던 가우리는 제르가디스가 쏟아놓은 서류더미를 뒤집어 쓰고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야, 작년엔 너 혼자도 잘 했잖아!" "그건 작년이지!" 방 안에 들어온 크로츠는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눈쌀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바쁘십니까?"
"아, 아닙니다. 저 서류는 왕자 전하께서 다 처리하실 테니까, 이 쪽 테이블로 오세요."
너 정말 이럴 거야 남은 심각한 고민 중인데 라며 떠들어대는 가우리를 무시하고 자리에 앉은 제르가디스는 서류를 들춰 보았다. '마도학?' 크로츠가 입을 열었다.
"위원장도 아실 테지만 현재 노바의 마도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뒤쳐져 있습니다. 국내의 인재들도 연구와 공부를 하기 위해 다들 국외로 빠져나가고, 그 중 많은 수가 크림슨으로 흘러 들어가는 형편이니 우리는 점차 뒤떨어지고 그들은 점차 지식을 쌓아가는 악순환이죠. 비관적인 사람들은 우리의 수준이 남해안 도시국가들보다 못하다고 말해요. 이번 회담에서 꼭 마도학 교류를 해야 합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나도 답답하다고. 하지만 이번 회담에 마도학이 빠져있을 거라는 것은 노바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상되었던 일인데. 이렇게 많은 자료를 준비해 오다니... 제르가디스는 문득 생각난 듯 물어보았다.
"올해 처음 회담위로 오신 거죠?"
작년에는 본 기억이 없으니 그렇겠지. 과연 크로츠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작년에 리나가 피운 소란도 보지 못했겠군. 물론 노바 입장에서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걸 본 사람이 왔다면 좀 더 편했을 텐데. 안 그래도 수정된 안들을 검토하기도 빠듯한 시간에 왕자의 투정까지 들어주느라 정신없는데, 어차피 안 될 일에 대해 위로까지 해야 하다니. 제르가디스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저 쪽에서 마도학을 협상안으로 내놓지 않은 이상 어렵습니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 균형을 맞춰가고 있는데, 우리만 무리하게 뭔가를 더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도 뭔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그러면 전체적인 조정안을 다시 짜야 하고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마도학의 발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다른 분들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무리해서라도 크림슨에 교류를 요구해야 합니다. 그들도 끝내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랬다면 작년 그 소란이 왜 일어났겠어. 굳이 리나가 한 번 더 회담장에서 그 난리를 피우게 하고 싶다면야... 아!
"가우리, 어떻게든지 그 녀석을 보고 싶어?"
투덜거리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가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앉은 제르가디스는 등을 돌린 채였고, 크로츠는 갑작스런 말에 놀란 듯 제르가디스와 가우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응. 무슨 방법 있어?"
제르가디스는 몸을 돌려 등받이에 팔을 얹고는 가우리를 바라보았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제르가디스. 다시 생각해 봤더니 말야."
"말해."
"너무 무식한 방법인 것 같아."
"어쩔 수 없어. 실제로 무식하잖아."
"뭐야, 인정하는 거야?"
"너 말야, 너! 어쨌든 회담장을 다 부수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내가 시킨 대로만 해."
예상대로 크림슨 측의 탁자 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크로츠와 제르가디스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제르가디스는 태연한 자세였고 크로츠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아멜리아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람이 황급히 회담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가우리는 제르가디스에게 속삭였다.
"올까?"
"아직."
시간을 끌려는 듯 아멜리아가 손을 들더니 말했다.
"마도학 교류를 굳이 원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크로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멜리아님. 불과 2년 전까지 두 나라의 교류에 마도학이 빠지지 않았을 터입니다. 그것이 작년부터 비정상적으로 중단되었으니 재개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재작년까지는 교류를 하고 있었지. 마도사 협회에 수장이 없으니 하나마나 유명무실한 교류였지만.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서 마도학을 협상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섣부른 견해입니다만, 마도학 부분에서 그간의 교류가 노바나 우리 크림슨 양 측에 만족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군요. 하여 좀 더 효율적인 다른 방면의 교류를 원했던 것입니다."
크로츠는 더 이상 말하기도 아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현재 노바는 마도학 교류를 원합니다. 회담 내용에 관해서는 아멜리아님께 전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세부사항은 논외로 치더라도, 교류가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확답을 주시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건..."
그 때 한 여성이 회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아멜리아의 지시를 받았던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녀를 보더니 살짝 목례했다. 제르가디스가 가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왔군. 저 사람은 리나의 오른팔이야. 준비해."
"뭘?"
"곧 리나가 올 거야."
회담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는 마도사 협회의 부회장인 마리아 네케르입니다. 마도학을 협상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왔습니다."
"나는 노바의 왕실 마도사인 크로츠 수만이오. 내가 그 안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난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저는 협회장의 의사 대변인으로 왔습니다.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본 협회에서는 마도학의 교류를 원하지 않습니다."
"뭣이?"
크로츠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제르가디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과 비슷한 패턴이군. 곧 온다. 여기서 회담 쫑내고 싶지 않으니까 잘 해."
"맡겨 둬."
회담장의 분위기는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거절당할 줄 예상 못했던 듯 크로츠의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회담 위원 중 일부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 비슷한 일을 겪어 본 대부분의 위원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일국의 사자로서 온 사람의 요청에 책임자도 아닌 대리인이 와서 거절 통고를 한다는 말이오? 이러고도 크림슨이 노바를 존중하는 이웃으로 대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노바는 크림슨을 존중했습니까?"
쌀쌀맞은 목소리에 회담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제르가디스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 것처럼, 리나가 서리내린 표정으로 그 곳에 서 있었다.
# by | 2007/06/07 01:24 | 슬레이어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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