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12일
[슬레이어즈] 붉은 바다 -04
by JoysTiq
술렁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부자연스런 침묵에 불편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멜리아는 곧 훅하며 끼쳐오는 열기를 느꼈다.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맹렬한 적의. 노바의 위원들이 무의식 중에 몸을 뒤로 젖힐 만큼 감정의 기류는 분명하게 뿜어져나왔다. 마치 그녀가 있는 곳부터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리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무시하고 똑바로 크로츠만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날 찾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크로츠는 흥미롭다는 듯 리나를 바라보았다. 대외적 명분이나 그 외 별다른 설명을 대려는 시도도 없이 딱 부러지게 교류를 거절해버린 크림슨의 마도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도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소녀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랬소."
리나의 붉은 눈동자가 크로츠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던 제르가디스는 흘끗 고개를 돌려보았다. 가우리는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분노에 놀란듯 몸을 굳히고 있었다. 예상보다 심각한 그녀의 태도에 긴장한 모양이었다.
조용한 회담장에 크로츠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바와 크림슨의 마도학 교류를 요청합니다."
리나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크로츠를 향한 눈을 돌린 그녀는 노바 측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노바 측 위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리나는, 마지막으로 제르가디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좋습니다."
크림슨 인사 중 몇 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쓴웃음을 짓는 제르가디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리나는 말을 이었다.
"교류 기간은 양측이 만족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하며, 반 년마다 백 명의 마도사를 노바로 파견하고 이백 명의 마도 수련사를 크림슨에 받아들이겠습니다. 크림슨의 마도학 서고들과 왕실 마도 기록, 비공개 자료를 공개하며, 각 지방의 협회마다 의무적으로 입학생의 반 수 이상은 노바의 수련생을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따가운 리나의 눈빛을 받아내며 제르가디스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크로츠가 저런 말을 한다는 데는 어떤 형식으로든 제르가디스 자신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을 리나가 모를 리 없다. 나중에 꽤나 들볶이겠는데. 그 원인이 되었던 가우리는 빛나는 눈으로 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말을 쉰 리나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크로츠를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또한 동시에, 노바의 왕실 서고 공개와 왕실 마도사 모두와의 개인 면담, 그리고 신전 자료 공개를 요구합니다. 붉은 바다가 걸쳐진 노바의 그레딘 지방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연구하는 것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 지방민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함구에 대한 압박을 가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데 방해하지 말 것이며, 근 20년에 걸쳐 새로이 설립된 모든 마도 연구소, 혹은 개인 연구소와 그 연구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요청합니다. 조사단의 연구에 노바 왕실은 일체 관여할 수 없으며, 그 발표에 대해서도 어떤 압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 회담장이 조용해졌다.
'리나 언니가 그럼 그렇지.'
아멜리아는 머리가 아파왔다.
실상 붉은 바다는 두 나라 간 오랜 대립의 원인이었다. 죽음의 바다가 펼쳐지고 그 바다와 맞닿아있던 카듐 지방의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한 그 사건에, 노바가 개입되었다는 의심이 계속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크림슨의 분노는 노바의 오만한 외면에서 비롯되었다. 진상 규명을 해달라는 모든 요청을 묵살한 노바 왕실은 크림슨의 자체 조사 인력도 자국 내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리나의 이야기를 듣던 크림슨 인사들은 당황과 시원함이 뒤섞인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아멜리아 역시 노바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터라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일국 회담위의 수장으로서 그 해프닝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그녀는 건너편 테이블의 제르가디스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생각하기에 저 크로츠란 인물이 리나 언니를 상대할 정도로 협상에 능했던 걸까?
헌데 정작 크로츠에겐 리나의 태도가 예상보다 강경했던 게 틀림없었다. 할 말을 찾느라 잠시 시간을 지체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니, 협상을 원한다면 일단 마도학 교류를 협상안에 올려놓고 그 후에 세부사항을 논의할 일이지, 그렇게 마음대로 조건을 다 정해버릴 수는..."
리나의 목소리는 무자비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제시한 조건 그대로가 아니면 교류는 없습니다."
아멜리아는 갑자기 회담장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본 아멜리아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왕자!'
지금까지의 협상 과정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가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협회장의 발언은 잘 들었습니다."
크로츠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가우리는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노바의 왕자가 크림슨에 찾아와 처음으로 하는 공식발언이다. 이제 회담장의 모든 이목은 그에게 쏠려 있었다.
"결국 마도학의 교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다시 약간의 술렁임이 있었다. 아멜리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 하면 그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아니, 그보다 여태 침묵을 지키던 왕자가 하필 이 건에 대해서 직접 나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틀 전 만찬에서 보았던 가우리에 대한 리나의 태도를 떠올려 본다면...
'언니!'
리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렇습니다."
술렁임이 커지고 있었다. 크림슨의 인사 중 몇 명은 몸을 일으키며 리나를 말리려는 몸짓까지 취해보였다.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마도학은 크림슨이 가진 가장 큰 강점 중의 하나다. 아무렇게나 개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르가디스까지 당황하여 약간 몸을 일으켰다. 리나에게서 저 정도의 대답을 끌어낸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작년과 같다면 리나는 벌써 소란을 일으켰어야 했다. 가우리가 나선다면 리나가 어느 정도 자제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했지만 이런 반응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그러나 리나와 직접 마주선 가우리만은 그녀의 말에 깃든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붉은 바다.'
자신이 여섯 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날엔가 갑자기 국내의 이름난 마도사들이 모두 입궁했던 것이 기억난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부왕은 별 일 아니라며 신경쓸 것 없다고 했고, 그런 왕의 분부는 지금까지도 그대로였다. 뭔가 있는 건가? 정말로. 가우리는 제르가디스의 말을 떠올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노바의 왕실 마도사들이 모두 나선다해도 붉은 바다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
"일단 그런 의사가 있으시다면 좋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왕자를 바라보았다. 가우리는 리나의 시선을 잡아두려는 듯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크림슨이 원하는 조항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노바가 원하는 조항은 협회장이 말씀하신 것과 약간 다른데요."
이 사람들이 설마? 노바와 크림슨의 인사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도학의 교류 조항에 관해서는 그 어떤 내부 조정도 거친 바가 없다. 이렇게 대충 뚝딱 때려맞추려는 건가?
가우리의 말이 이어졌다.
"어떻습니까? 회담위원장인 나와 둘이서만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는 것은? 난 이 회담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회장의 의견이 타당하다면 양 쪽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삼자는 제쳐두고 간단하게 둘이서 얘기해보죠."
'그렇구나!' 여기까지 들었을 때 아멜리아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이건 협상이 아냐. '가우리 왕자가 리나 언니를 만날 기회를 만들려고 한바탕 쇼를 벌였군.' 그렇다면 그 꾀는 제르가디스 오빠에게서 나왔겠지. 리나와 제르가디스의 성격을 모두 아는 아멜리아였기에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제르가디스를 돌아보자 그는 과연 두 주먹을 쥐고 "그래! 빨리 그 파괴신을 데리고 퇴장하라고!"라고 입모양으로만 외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다시 리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리나 언니가 속을까? 가우리와 마찬가지로 위원장인 그녀는 가우리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회담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다해도 리나가 말한 정도의 조건을 수용할 수는 없다. 그건 회담에서 가능한 협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담에 무관심했던 리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나요?"
앗싸! 라는 말은 제르가디스나 가우리의 행동 어디에서도 직접 튀어나오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은, 회담을 진행하는 데도 방해가 되고 보는 눈도 많아서 말하기에 좀 불편하지 않습니까? 밖에서 좀 편하게 이야길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자, 나가시죠."
가우리는 말 만으로 그치지 않고 함께 나가자는 제스처를 하며 리나에게 성큼 다가섰다. 리나는 가우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린 리나는 아멜리아 쪽에 시선을 주었다.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왕자를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겠지.
두 사람이 퇴실하자 회담장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아멜리아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애쓰는 동안, 제르가디스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가우리가 거짓말한 걸 들키면 리나가 보통 화내지 않을 텐데. 뭐, 가뜩이나 바쁜 사람을 찾아와 푸념해댄 벌로 그 정도면 딱 알맞겠지. 어쨌든 본인은 왕자의 소원대로 리나와 만나게 해 줬고, 리나는 다행히도 큰 말썽없이 회담장을 빠져나갔으니 더이상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진행 중이던 안건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던 하룻밤이었다.
리나와 함께 나간 가우리는 다시 회담장에 돌아오지 않았고, 양국의 회담 책임자들은 그 사실을 일견 다행으로 여기며 그 날의 회담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 후에는 저녁 식사가 있었고, 곧 양측 위원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에서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던 아멜리아는 협상 후 있었던 제르가디스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 해프닝은 제르가디스가 고의로 일으킨 것이었다. 제르가디스가 미안하다고 했을 때 아멜리아는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협상 때 양보를 좀 해주면 어때요?' 그것과 이건 다른 얘기야, 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제르가디스다웠다.
하품을 하며 아멜리아는 눈을 비볐다. 자기 전에 수정안을 좀 봐두려고 했는데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내일 해야지. 머리맡에 대충 서류를 내던져둔 아멜리아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녀가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콰쾅-!
잠을 덜 깬 채로 아멜리아는 상체를 번쩍 일으켰다. 비몽사몽이라 꿈 속에서 들었는지 아닌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창 아래로 불빛들이 보이며 경비병의 고함소리가 은은히 들려왔을 때, 그녀는 방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자객이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멜리아는 서쪽 탑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았다. 저 곳은...?
'노바 회담위의 숙소잖아!'
경비병 한 무리가 그녀의 곁을 우르르 지나갔다. "가라!" "불을 꺼!" 아멜리아는 그 중 한 명을 잡아챘다. "뭐...!" 다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려는 경비병을 재차 잡으며 아멜리아는 숨막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숨을 헐떡거리며 경비병이 소리쳤다.
"자객입니다! 서궁에 자객이 침입해서 불을 질렀습니다. 지금 서궁 내부의 상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 알았어요. 가 봐요!"
경비병을 내버려둔 채 아멜리아는 서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역시, 노바의 중요인물을 노린 테러인가? 안의 사람들은 무사할까?
'하지만 제르가디스 오빠가 있는데 어떻게?'
서궁 앞에선 경비병들이 몰려선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을 길어와 불을 끄려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불길이 너무 커져 역부족이었다. 서궁 앞에 당도한 아멜리아는 앞을 막아서는 경비병을 보지도 않고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아쿠아 크리에이트!"
쏴아-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서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물벼락을 맞고 서궁의 입구를 태우던 불길이 사그라들자 아멜리아는 경비병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서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이봐요! 위험해요!"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으나 아멜리아는 뒤를 향해 외쳤다.
"걱정 말고, 마도사 협회의 리나님과 마리아님에게 빨리 연락해요!"
바깥쪽에서 한 번 더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올린 아멜리아는 머리 위의 천정이 무너져 내리려 하는 것을 보았다. '안 돼! 입구가!'
"대지여 나를 따르라! 다그 하우트!"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져내렸다. 바닥에서 솟은 기둥들이 막 무너지려 하던 천정을 떠받치고 있었다. 주문이 먹혀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아멜리아는 궁 안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빨리요!"
궁 내부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통로는 이미 무너져내린 벽과 잔해로 상당 부분 막혀 있었다. 윗 쪽에서는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멜리아는 마음이 다급해져 재빨리 질식한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1층과 2층에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피한 듯 방마다 텅 비어있었지만, 3층에 올라서자 복도 여기저기에 쓰러져 기절한 사람들이 보였다. 불길이 갑자기 일어났는지 미처 대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끌어다 한 곳에 모은 아멜리아는 그 위에 반원형의 바람의 결계를 쳤다. 얼마 버티지 못할 테지만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조금만 참아요, 곧 사람들이 구하러 올 거에요.'
그 때 옆방에서 주문영창이 들려왔다. "프리즈 애로우!" 갑자기 냉기가 느껴지자 아멜리아는 엉겁결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쿨럭 쿨럭! 이게 도대체! 아니, 아멜리아님이 아니오?"
팔을 내린 아멜리아는 그 사람이 노바 회담위의 한 명이었던 왕실 마도사 크로츠임을 알아보았다.
"크로츠님! 무사하셨군요!"
"아, 예! 자다 일어나니 웬 연기가 이렇게, 대체 무슨 일..."
"자객이에요!"
"네?"
크로츠는 흠칫하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자객이라니, 그럴 리가..."
'어?' 아멜리아가 위화감을 느꼈을 때 다시 한 번 위 쪽에서 펑 하며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이 미미하게 흔들리더니 머리 위에서 불붙은 나무조각들이 떨어져내렸다. 두 사람은 잠시 움찔 몸을 웅크렸다가 동시에 위 쪽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없어.' 아멜리아는 빠르게 생각했다.
"자세한 얘긴 나중에! 제르가디스님과 가우리님은 어디에 있죠?"
"아, 그 두 분이라면, 5층에..."
"알았어요. 전 위로 올라갈테니 크로츠님은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말을 마친 아멜리아는 몸을 돌려 뛰어가려다가 멈췄다.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크로츠는 불붙은 자기 방 쪽을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크로츠님?"
크로츠의 주름진 이마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꼭 불길 때문만은 아닌듯 싶었다. 아멜리아는 기절한 사람들에게 쳐둔 바람의 결계가 사라지려 하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가 다시 결계를 쳤다.
"크로츠님, 이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
"미안하오, 아멜리아 님. 정말 중요한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오랜 연구 자료요!"
"크로츠님! 콜록 콜록!"
크로츠는 아멜리아의 부름을 못들은 척 다시 방 안에 뛰어들어갔다. 아멜리아가 다시 한 번 뭐라고 외치려 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멜리아님!"
아멜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아님!"
마리아의 뒤로 여러 마도사들이 사방에 물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리아가 연기를 헤치고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멜리아님!"
"아, 와주셨군요. 다행이에요!"
"지금 바깥쪽에서도 불을 끄고 있어요. 아멜리아님은 이제 여기서 나가세요, 위험합니다!"
아멜리아는 쓰러진 사람들을 돌보는 마도사들과 크로츠의 방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사람들을 부탁해요!"
"아멜리아님!"
마리아의 외침을 뒤로 하고 아멜리아는 계단으로 내달렸다. 가우리와 제르가디스 두 사람이 여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정령 마법의 최고 수준에 이른 마도사였고 가우리도 꽤 강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벌써 나타났어야 하는데...!
5층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부터 들려왔던 폭발음의 진원지가 여기였는지 유독 망가진 모습이 심했다. 복도의 초입을 가로막고 쓰러진 불붙은 기둥에 다시 한 번 아쿠아 크리에이트의 마법으로 물을 쏟아부은 아멜리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제르가디스 오빠!"
마치 그에 대답하듯 복도 안 쪽에서 큰 고함소리가 나더니 또 한 번 폭발음이 울렸다. 콰쾅-! 아멜리아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소리가 난 쪽으로 내달렸다.
"프리즈 애로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맞춰 날려버린 아멜리아는 계속 달리며 외쳤다.
"거기, 누구에요? 누가 있어요?"
"조심해!"
복도 코너를 막 돌아선 그녀에게 큰 고함과 함께 번쩍 하는 빛이 날아들었다. "꺄악!" 자기도 모르게 팔로 얼굴을 보호한 아멜리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프지 않아?' 팔을 살짝 내리니 그녀가 기대앉은 벽에 팬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으악?!"
"이봐, 괜찮아?!"
이 목소리는... 아멜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뛰어든 작은 홀의 광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듯 여기저기 패이고 무너진 잔해로 가득한 홀에선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홀 벽면의 반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들을 등진, 회색 망토를 뒤집어쓴 세 명이었다. 그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본 아멜리아는 그들이 마도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머지 한 쪽은 빛나는 검을 든 사람이었다. 아멜리아에게 등을 돌린 채 세 명과 대치하고 있던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이봐! 괜찮은 거야?"
"아, 네!"
얼떨결에 대답한 아멜리아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 허리까지 내려온 금발머리와 눈에 익은 체격, 그리고 빛나는 저 검은...
"가우리님?!"
가우리는 급한 김에 검의 에너지파를 날려 갑자기 들어온 누군가를 구하긴 했지만, 그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은체 만체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마도사들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 적당히 하고 돌아가라고! 이미 소방작업이 개시되었으니 곧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우물쭈물하다가 잡히고 싶어?"
아멜리아에게 파이어 볼을 날렸다가 가우리에게 가로막혔던 마도사들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 쪽이야말로 항복하시지요. 두 사람이나 보호하며 우리 세 명과 맞싸운 것은 가상했지만, 시간이 없는 만큼 우리도 이제 봐주지 않겠소!"
아직 주저앉은 채였던 아멜리아는 가우리의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에 놀라고 있다가 마도사들의 말을 듣고는 더욱 놀랐다. '두 사람? 설마?' 시선을 돌리자, 과연 가우리의 뒤 쪽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멜리아는 용수철이 튕기듯이 일어섰다.
"리나 언니? 제르가디스 오빠!"
# by | 2007/06/12 00:10 | 슬레이어즈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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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글 정말 잘쓰시네요ㅠ
붉은 바다 및 여러가지 소설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건필하세요!!>ㅁ<
붉은 바다에 처음으로 올라온 감상이군요 ㅠ
저도 두 나라를 쓸 때 한일관계를 떠올리면서 쓰고 있어요~ 느낌이 거의 딱이죠.
하여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_^
유리나님도 하시는 일 모두 잘 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