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빚의 기억

며칠전 저녁, TV로 <사채>에 관한 방송을 봤습니다.

사채 100만원을 빌려썼다가 1억 5천만원의 빚을 지고 쫓겨다니며 살게 된 주부의 이야기가 눈을 사로잡더니, 이어서 그렇다면 급전을 마련하기 위한 다른 방법이 있느냐는 얘기도 얼핏 나오더군요. 그런데 보통 사채 전 단계로 말하는 신용카드 대출도 사채 못지않게 이자율이 높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최고율이 자그마치 연이율 30% 정도더군요. 게다가 조금 알아보니 몇 달만 연체되어도 '원금+이자'를 매번 새로이 '원금'으로 적용해, 다달이 높은 이자를 매기는 대환 대출로 바꿔버리기도 한다던데... 제도 금융권이 제공하는 서비스라는게 서민을 제대로 잡더군요.

정확한 프로그램 이름이나 방송사가 기억나지 않아 어떤 프로였는지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뭐 복잡한 내용이 아니라, 간추리자면 결국 결론은

죽어도 사채 쓰지 마라

였습니다만,
심정상 신용카드 대출도 되도록이면 받지 말라는 걸로 보이더군요. 하긴 카드빚에 고생하는 사람도 꽤 많잖습니까.


신용카드 대출이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저도 카드빚을 져본적이 있습니다. 그다지 좌절스러웠던 기억은 아닙니다만, 하마터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겠네요. 그냥 그 얘기좀 해볼까 하고요.

대학교 2학년 때였던걸로 기억하는데요.

어느날 폰으로 문자가 띡 왔더군요. 보니까 '피부미용 이벤트에 당첨되셨으니 공짜로 검사 한번 받아보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길에서 하는 이벤트에 별 생각없이 응모했던 기억이 나더군요. 당시 전 정말 순진했던지라!(...) 액면 그대로 "와 공짜로 피부 검사해준대~"라며 룰루랄라 서울 강남의 한 피부미용실에 찾아갔습니다. 업체명은 거론않겠습니다만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의 계열사로 보이더군요.

검사를 받고 보니 어쩐지 심각한것 같은데다 관리사 언니들이 자꾸 이거 안되겠어요~ 꼭 관리받으셔야겠어요~ 라며 저를 부추기는데 비용이 자그마치 1년에 200만원. 제가 그런 돈이 있을것 같나요;; 돈이 없어 안된다고 했더니 신용카드를 불법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저를 설득하기를 두 시간. 마침내 넘어가서 카드를 만들고 계약을 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만들었던 카드가 어떤 은행의 신용카드와 xx캐피탈의 캐쉬론 카드.

신용카드를 생애 처음 만들어서 한도가 200만원이 안되었기 때문에, (아마 12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머지를 캐쉬론 카드를 이용해 ATM기에서 바로 현금을 인출해 지불을 했죠.

피부미용 결과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지만 200만원을 1년 안에 갚기란 무리였습니다. 더구나 매달 나오는 이자가... 어마어마하더군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자만 매달 10만원 정도 나오지 않았었나 합니다. 부모님께는 전혀 알리지 않고 제가 혼자 갚아나가는데, 용돈으로 그걸 처리하기란 무리였죠. 과외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카드빚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데 그 언니들 저를 다시 꼬시기 시작하더군요. 피부미용 1년 받은거는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더이상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ㅠ0ㅠ 두 시간 동안 앉혀놓고 집에 안보내주는데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또 반년 계약을 했죠. 결과만 말하자면, 반년 후에 또 한번 계약을 했어요.

총 세번. 제가 돈없다고 뻗대어서 그나마 비용은 줄어들어, 처음 했던 것만큼 무지막지한 액수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카드빚은 어느새 300만원이 훌쩍 넘어가 있었어요. 이자가... 평범한 대학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더라구요. 그 즈음 과외를 두 탕씩 뛰기 시작했죠. 수업은 21학점 풀로 들으면서 과외 뛰는게 쉽지는 않더군요.

평일 오후를 거의 과외하느라 보냈으니 수업을 위한 조모임에 참석한다던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친구들은 제가 바쁘게 알바를 하면서, 정작 돈을 모으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더군요. 매달 용돈을 받는데다 별도로 수십만원이 생기는데 돈을 쓰는 폼은 그다지 넉넉해보이지 않으니 말이에요. 지금에야 지난 일이니 이렇게 말을 하는거지, 당시에는 그다지 설명을 하고 다니지 않았었죠.

3년인가가 지나서 그 돈을 모두 갚았을 때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이 나네요.

드디어 빚 다갚았다!!

라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사실 저는 평소에도 그다지 카드빚을 의식하지 않고 지냈었죠. 계속 알바를 해서 은행에 돈을 밀어넣는 일도 오래 계속되다 보니 그냥 일상처럼 되어버리고, 돈을 적당히 아껴쓰는 것도 익숙해져서,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절망한다던가 우울해하는 일 없이 친구들하고 웃으면서 놀 때는 놀고 그렇게 지냈으니까요.

그런데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압박감이 자리잡고 있었나봅니다. 시시때때로 계정을 조회하고 빚이 얼마가 남았구나 한숨을 쉬면서, 앞으로 몇 달이면 된다..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알지 못하게 후회로 다가왔었나봐요. 그 돈 저금했으면 얼만데.. 하는 아쉬움도 있고요. 여하튼, 몇 년만에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느낀 가장 큰 감정은 해방감이었지만요.

그렇게 지나버린 일이, 며칠 전 방송으로 떠오르더라구요.
그 때는 그저 조회기록에 찍힌 숫자대로 돈을 입금하고 남은 돈을 보고, 그냥 그것뿐이었는데 방송화면에 나온 살인적인 연이율을 보니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 때는 미처 몰랐는데, 알고보니 저도 그렇게 높은 이자를 내고 있었던 거에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그런 이자를.

카드빚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을 멀게만 봐왔는데, 그러고보니 저도 카드빚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그리고 그 빚을 지게 되는 경위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평소 전혀 과소비를 한다거나 하지 않아도, 아주 사소한 계기로 빚을 질 수 있고 그에 대한 이자는 너무나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거죠. 제도 금융권에서 그렇게 돈을 융통할 길이 막히면 이후에 손을 뻗게 되는 곳은 결국 사채. 인생 파멸이군요.


개인적으로는 그 때의 경험을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함부로 돈을 빌리지 않는 습관을 얻었으니까요. 웬만해서는 계산할 때도 현금을 내밀게 되지, 신용카드는 잘 쓰지 않게 되더라구요. 그 때처럼 쉽게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도 되고, 심지어 할부를 꺼리는 버릇까지 생겼어요. 할수 있으면 일시불, 일시불이 안되면 그냥 안사버리게 되더군요. 그래도 아직 어렸을 때 한번 데여보고 조심하게 됐으니 그만한 교훈을 얻은 것치고는 비싸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빚과 사채를 조심하라는.

하지만 덩치 큰 부자나 기업의 배만 불려주는 정책에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이자율을 책정하는데 아무런 제한이나 기준이 없이 마음먹은대로 정하고, 거기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으니까요. 100만원이 1억 5천만원으로 부풀어버리는게 정상인가요. 자본주의 사회는 기브앤 테이크라는데 피해자가 얻은건 100만원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 뿐이고, 그냥 공중에서 뚝 떨어진 듯한 나머지 1억 4천 9백만원의 쾌락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게 참으로 불합리합니다.

사채업자나 금융권은 피해자의 호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입법자들도 금리 제한이 어렵다면서 난색을 표하니... 안타깝습니다. 길거리에 지뢰를 깔아놓고 하는 말이라고는 "밟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뿐인 것 같아서요.

이렇게 토로할 뿐인 제게도 아무 힘이 없지요.

그저 밟지 않게 조심할 수밖에요.

by JoysTiq | 2007/08/13 18:07 | 밖에서 있었던 일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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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섭씨0도 at 2007/08/13 18:31
잘 읽었습니다. 학생을 부추겨서 이러는건 진짜..-_-;;
하긴 그러고보니 저희 대학교 앞에 대학생 대출 어쩌고 하면서 광고 현수막이 붙어있곤 했군요.
학생들 아직 어리고 돈 잘 안떼먹는다고 봉으로 아는걸까요;;;;
그나저나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몸고생보다 역시 마음고생이 진짜..
사채도 신용카드도, 지인들한테도 어찌됐건 돈은 안빌리는게 최고입니다. T_T..;
Commented by 바람처럼 at 2007/08/13 19:33
복리는 양날의 칼이라 불릴 때는 좋지만 빌릴 때는 악몽이죠. 대출을 하게 될 때는 담보대출이 그나마 제일 안전하다더군요. 신용대출처럼 이자율이 널뛰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Commented by ranigud at 2007/08/13 19:46
아마 프로그램은 MBC의 [뉴스 후] 였을겁니다.
Commented by imc84 at 2007/08/13 22:38
아 정말... 사채든 카드빚이든 평생 건드리지도 않은채 살고싶네요.
평생 그 정도의 평화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꽤 성공한 인생일 것 같아요.
Commented by JoysTiq at 2007/08/14 14:48
섭씨0도//네 대학생들이 돈 빌려서 갚는다는건 참 힘들죠. '정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큽니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저한테 돈 빌려달라는 지인은 아직 없었는데요 ^^; 정작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힘들것 같군요. 줄 수 있는 액수면 주고 잊어버리는게 좋을 것 같아요. 빌려주는 것보다는.

바람처럼//그렇군요. 앞으로 돈빌릴 일이 안생기게 빌어야겠습니다. -ㅁ-

ranigud//맞아요!! 그거였던 것 같아요.
같은 프로그램을 보셨나보네요. ^^

imc84//네 그렇죠. 그렇게만 되면 일단 궁지에 몰려 파멸하지는 않는 인생이니까요.
최소한 막장은 피하는거라 할 수 있겠죠. 카드빚 특히 잘 피해야 합니다. -3-
Commented by LaJune at 2007/08/15 00:50
고생하셨습니다. ㅠ_ㅠ
동생녀석이 S모 카드에 얽힌 적이 있어서 조금 압니다. 그녀석도 최초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100여만원 카드 대출했던 것이 나중엔 600여만원으로 늘어나 있더군요. 몇년 끙끙대다가 혼자 감당이 안 되다보니 결국 엄마께 뽀록나고 저도 메꿔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이율이 살인적이더군요. 그놈이 그놈으로 보이는데 저게 사채업자랑 다른건 뭘까 참 고민했습니다. 하긴, 차이는 있군요. 사채는 일단 거기서 신용조회만 받아도 신용불량자가 되니까 그 차이인걸까요. onz
Commented by JoysTiq at 2007/08/15 12:09
라준//헉;; 100이 600으로;; 대체 어떻게;;
이율의 세계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미묘합니다!;; 동생분이 정말 고생하셨군요.
빌린돈은 저보다 훨씬 적은데, 저만큼 고생하신듯;; 저도 신용대출과 사채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손대선 안될 영역이지요!
Commented by yurina at 2007/08/16 01:17
연 이자율이 20% 만 넘어도 살인적 이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66%가 나라에서 정해준 적정선이니..
그런 사채 광고를 케이블만 틀면 여기저기서 펑펑..
이런걸 보면 나라가 어떻게 될련지 한숨만 나오는군요-_-;
Commented by JoysTiq at 2007/08/16 14:47
yurina//나라에서 허가해주고 있으니 사채 자체를 욕한다기보다, 나라에 대해 한숨을 쉬게 되네요. 이 나라는 너무나 힘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서민들 스스로가 서로를 보호해야 하죠. 66%라고요? 지금 무슨 만화 속에 사는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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